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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범종(梵鐘) 앞에서 내 삶의 희열을 느낀다.

시간의 울림, 마음의 평온을 느끼는 순간

유장수 칼럼

 

 

우리는 가끔 생활 중에 사찰(寺刹:절)을 방문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방문자의 종교는 출입하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출입이 자유로운 것이 보통이다. 다른 종교의 성전은 이교도들이 드나들 때 제약이 없더라도 어딘가 스스로 어색하고 서먹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사찰만큼은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전혀 제지를 받지 아니하고 부담스럽지도 않다.

  

그런데 막상 사찰을 찾은 사람들 중 대부분은 경내에 피어 있는 벚꽃이나, 주변의 오색 찬연한 단풍이 든 경관에만 정신이 팔릴 뿐, 기실 자기가 찾은 사찰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 사찰의 중심 전각 현판에 대웅전(大雄殿)이라 씌어 있는지,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씌어 있는지조차 관심이 없다.

 

어쩌다 드물게 범종각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경우가 있다 해도, 범종의 크기에 잠시 고개를 몇 번 끄덕일 뿐 이내 자리를 뜨고 만다. 이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불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으니, 사찰에 대한 구체적인 것에도 관심이 적은 터일 것이다.

 

그러나 이왕 시간을 내어 사찰을 방문했으니, 가능하면 불교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고, 그 사찰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얻어 오려는 노력이 있다면 하루가 더욱 보람될 것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사찰에는 그들 나름의 흥미 있는 여러 장소도 있고, 어쩌면 그 동안 우리가 모르고 있던 이야깃거리가 풍성하게 얽혀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범종각에 달려 있는 범종만 해도 그렇다. 이야깃거리를 찾아보면 할 말이 꽤 있다. 사찰에 있는 범종은 우선 크기 면에서 다른 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크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서양의 종은 여기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뿐만 아니라, 종을 치는 방식도 다르다.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종을 높이 매달아 놓고 아래쪽에서 줄을 당겨 종 안쪽을 때려서 소리를 낸다. 높이 달아 놓는 것은 그래야 멀리까지 소리가 나아갈 수 있다는 이치다. 우리나라 교회 종탑이 높게 마련된 것도 이러한 서양의 영향을 받은 까닭이고, 오래 전 우리가 학교에서 경험했던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릴 때 울리던 종도 말하자면 안쪽에서 치는 서양식 종이었다.

 

그러나 범종은 크고 무거운 이유도 있지만 서양의 종에 비해 낮게 달았고, 바깥쪽에서 두드려 소리를 낸다. 사찰의 범종각을 보거나, 해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자정에 듣게 되는 보신각의 타종 모습을 보더라도 쉽게 짐작이 간다.

 

그런데 보신각의 종만 하더라도 그렇다. 원래는 사찰의 범종처럼 백성들의 안녕을 바라는 의미와 시각을 알리는 기능을 포함하여 타종을 했었다.

 

 매일 하루 중 새벽 4시에 파루(罷漏)라고 해서 33 번을 쳤는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제석천이 이끄는 하늘의 삼십삼천에게 나라의 태평과 무병장수, 그리고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했다. 이 파루를 신호로 하여 한양의 4 대문은 열리고, 사람들이 통행하도록 했다.

 

 또, 밤 10시에는 인정(人定)이라 하여, 28 번을 쳤는데. 이때는 사대문을 닫아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는 신호로 삼았다. 그러던 것이 근년에 이르러서는 매일 시각을 알리던 역할은 사라지고, 다만 다사다난했던 한 해의 마지막을 고하고, 밝아오는 새해의 희망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제야에만 종을 울린다. 그런데 사찰의 범종은 크기와 그 겉모습은 보신각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내적인 면에서는 종교적인 의미가 매우 깊게 배어있어 보신각의 그것과도 확연히 구분된다 할 것이다.

 

우선 범종의 겉모습이 서양의 종과 다른 것은 상부에 대나무 모양의 원통이 있고, 용이 조각된 고리 모양의 용뉴(龍鈕)가 있다. 이처럼 종 상부에 용이 올라와 있다는 게 사찰 범종의 특징이다.그런데 범종 위에 있는 이 용은 명나라 때 사람 호승지가 쓴 “진주선”에 나오는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과 관련이 있어, 설화적인 요소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다 하겠다.

   

용왕에게는 아홉 명의 자식이 있는데, 범종 위에 있는 이 용은 그 셋째 아들인 포뢰(蒲牢)라고 했다. 포뢰는 본디 바다에 사는 용인데, 성격은 소리 내는 것을 좋아하고, 고래를 매우 무서워했단다. 그래서 범종을 쳐서 소리가 나는 것은 포뢰의 엉덩이를 고래가 물었을 때, 그만 놀란 포뢰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라고 했다. 즉, 범종의 중간 부분에 있는 당좌(종을 치는 부위)는 포뢰의 엉덩이에 해당하고, 범종을 치는 당(통나무)은 고래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래에 물린 포뢰는 범종 위에서 입을 ‘쩍’ 벌리고 매우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어느 사찰은 범종을 치는 당을 아예 고래 형상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리고 용이라면 대개 입에 여의주가 물려 있는데, 이 포뢰의 입에는 여의주가 없는 게 일반적이다. 고래에 물려 깜짝 놀라 입을 벌리는 상황에서 여의주가 입 밖으로 튀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보신각의 범종도 두 마리 용이 상부에 대칭으로 올라와 있는데, 그 중 한 마리의 입에는 여의주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범종은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입구가 점점 넓어짐으로써 그 소리가 클 뿐만 아니라, 울림도 더욱 길고 은은하여 멀리에서도 능히 들을 수 있게 만들어졌다. 범종의 종신(鐘身:종의 중간 몸통 부분)에는 당좌(撞座:종을 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며, 특히, 종신의 네 방향에는 하늘거리는 옷을 입은 비천상(飛天像:하늘에 살면서 하계 사람과 왕래한다는 여자 선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는 종이 울리면 사방에서 곧 하늘로 날아오를 준비를 마친 비천상들의  긴장된 순간을 그린 모습이다.

 

종을 치면 종 내부, 그러니까 종 안쪽에서 그 동안 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며 농축되어 웅크리고 있던 수억만,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무량대수의 엄청난 소리의 입자들은 곧바로 떨쳐 일어나 부처님의 말씀이 되어, 사방 500 리에까지 힘차게 달려 나가고, 중간 부분의 비천상들은 마침내 불교에서 말하는 제석천이 있는 수미산 꼭대기까지 춤을 추며 날아오른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 범종 소리가 닿는 데까지 부처님의 말씀이 전해진다고 보았기에 사찰에서는 가능하면 범종을 크게 만들려고 애썼다. 사찰의 범종은 불교계에서 말하는 108 번뇌를 상징하여, 모두 108 번을 타종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종소리를 듣는 순간만큼은 중생들이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신앙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즉, 이 종소리와 함께 법문(法門)을 듣는 자는 오래도록 생사의 고해(苦海)를 넘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들이 범종각 앞에서 이러한 깊은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한다면, 자연 마음이 숙연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무엇인가를 잘 보기 위해서는 눈을 크게 뜨고 보라는 말을 듣는다. 일리 있는 말이다. 눈을 작게 뜨거나, 아예 감아버리면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 보여지는 것만을 보려고 할 때 그렇다. 때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실제로는 눈을 감고도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환하게 느낄 수도 있다. 눈을 크게 떠야만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참다운 나는 눈을 감았을 때 더 잘 만날 수 있다. 육신의 눈을 감고, 마음의 눈을 떠야 자아를 만날 수 있으니, 결국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수양을 근간으로 하는 불교를 흔히 “깨달음”이라고 했다. 이는 어찌 보면 “자신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비록 불자(佛子)가 아니더라도 오늘 범종각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묵상하며, 마음의 눈과 귀로 범종 소리의 의미를 음미(吟味)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는가. 여기 범종각 앞에 서서, 종교와 인생과 나의 진정한 자아가 투영된 찰나의 시간이라도 경험할 수만 있다면 하루를 허비했을망정, 이는 자신의 삶의 희열을 맛볼 수 있는 훌륭한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